미술 이야기

단테의 신곡

haghiasophia 2019. 3. 10. 23:54

인생길 반 고비에서 정도를 벗어난 단테는 어두운 숲에 있었다. 때는 1300년, 부활절을 사흘 앞둔 성금요일 저녁 무렵, 단테는 자신이 참혹하고 혼란스러우며 통과하기에 힘든 곳에 서 있음을 느끼면서 두려움에 온몸을 떨었다. (지옥편 시작글)

살면서 문득 길이 혼미하다고 느낄 때, 단테도 두려움에 떨었다.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중 한명인 외진 들라크루아가 그린 단테의 배 그림에서, 빨간색 두건을 쓰고 베르길리우스의 손에 이끌리는 단테의 표정이 그의 심정을 말해주는 것 같다.


단테는 1265년에서 1321년까지 살았다.

1292년까지 단테는 문학 청년으로 살았다. 맑고 새로운 문체를 구사하는 시인들의 집단인 청신체파 활동을 하던 시기다.

베아트리체를 사랑했으나, 1290년 그녀의 죽음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1301년까지 그는 현실 정치에 참여한다. 정치가로, 행정가로, 외교관으로, 군인으로.

단테는 로마교황을 옹호하는 궬피당Guelf을 지지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지지하는 기벨리니당Ghibeline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 하고,

이 후 궬피당의 승리한 후 궬피당이 흑당과 백당으로 나뉘는데 흑당이 교황 보나파시오 8세의 야심을 이용하여 백당을 패배시키고 단테를 추방했다.

이후 단테는 백당의 남은 사람들과 흑당을 무찔러 피렌체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라벤나에서 남은 삶을 보내게 된다.



정작 그들의 조국인 이탈리아는 지금 어떠한가! 단테는 안타까움을 마음속으로 토해냈다. ~~~ 가난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혼란은 그치질 않으니 이를 어쩌면 좋은가.

~~~ 당시에 단테는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맞고 있었다. 정치권과 교황권이 끝없이 갈등하면서 싸우는 곳이 바로 이탈리아였다. 단테의 고향인 피렌체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마다 잘났다고 뽐내는 자들이 서로 나서서 동료들의 가슴에 화살을 날리는 일이 허다했다. ~~~ 단테는 이런 상황에 절망했다. 그에 따라 꿈도 깨져 보렸고 방황의 날들만 이어졌다. (연옥편, 소르델로를 만나 이야기)


글쎄, 피렌체의 불행을 더 이상 보지 않기 위해서라면 하루빨리 지상의 삶을 마감하고 이곳으로 오고 싶지만 나의 바람대로 그렇게 빨리 현세를 떠나올 수도 없을 것 같네.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아야 할 피렌체는 날이 갈수록 점차로 선과 덕이 사라져 가고 있네. 앞으로 피렌체는 더욱 상황이 악화되어 불꽃 튀는 당쟁 속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 같네.~~~ (연옥편, 포레세를 만나 이야기)


단테는 위의 소르델로나 포레세와 같이 신곡의 지옥편과 연옥편에서 피렌체에서 맞이했던 많은 정치인들을 등장시킨다.

단테는 라벤나에서 있으면서 1308년부터 1320년까지 신곡을 저술한다.

그리고, 그 저술의 시작부분에서 1300년에 길을 잃었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의 정치 활동의 결과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단테에 대해

엥겔스는 "봉건적 중세기의 종결과 근대적 자본주의의 단초는 한 위대한 인물을 표지로 삼을 수 있다.

그 인물은 바로 단테다. 그는 최후의 중세 시인인 동시에 최초의 근대 시인이다"라고 했다 하고

T.S.엘리엇은 "서양의 근대는 세익스피어와 단테에 의해 양분된다.

그 사이에 제3자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다.

미켈란젤로는 "지구 위를 걸었던 사람 중 단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한다.


우리가 한글을 창제하기 전까지 글은 한문을 썼든,

단테가 살던 시기 단테가 수많은 역작을 이태리어로 만들어 내기 전까지 이태리도 라틴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였을까, 엥겔스나 엘리엇이 말했던 내용이.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집히는 것이 있다.

그는 1534~1541년에, 천지창조가 천정에 그려진, 시스티나 성당의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렸었다.



'16년 시스티나 성당을 방문했을 때, 화가가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싶어 10여분동안 물끄러미 계속 쳐다도 봤고, 그 후 한동안 그림을 걸어 놓기도 했었다.

미켈란젤로가 단테의 신곡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음이 분명했을 것이다.


단테는 지옥과 연옥, 천국으로 나눴다.

그리고 그는 그가 경험했던 (현실과 역사, 신화) 인물들을 그가 생각했던 가치에 따라 지옥과 연옥, 천국의 각 층에 배치를 했다.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저술로 남길 수 있던 것이 대단한 것일까?

그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정치인, 종교인)을 지옥에 보내고, 연옥에 보내게 되면

그들로부터 엄청난 항의와 압력을 받았을 터.

그럼에도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치를 했던 시기 그 자신의 활동에 대한 확신이 있었음일 것이고

회고를 통해 그 자신도 더 성숙해졌음일 것 같다.


생각보다 많은 분량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속의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고,

굳이 모하메드를 지옥에 배치한 것을 보면 그 당시 그의 세계관의 한계가 보이기도 한다.

한편 다른 사람도 아닌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그의 안내자로 삼은 것은

신성이 아닌 이성의 상징이라고 박상진 교수는 설명하기도 한다.

또, 지옥이 생략된 천국은 없으며

선한 삶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이성이다라고 지적한 부분이

근대의 시작이라 칭해지는 부분 같다.


그 어디에 있건 나는 태양과 별빛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은가

불명예스럽게 아니 치욕스럽게 국민과 조국 앞에 서지 않고도

그 어디서나 고귀한 진리를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

내게는 빵조차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서두의 길을 잃어 두려움에 떠는 단테가 신곡을 저술하며 당당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내세의 이야기를 빌어 현세의 이야기를 한 단테.


신곡의 장면들은 여러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지만

윌리엄 블레이크와 귀스타프 도레의 삽화를 잠시 짚어 본다.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는 영국의 시인이며 화가로 신비주의적 성격을 띈다고 한다.

그는 만년에 신곡 삽화 100매를 그렸다.



귀스타프 도레(1832~1883)는 프랑스의 삽화가이자 판화작가다.

장화신은 고양이, 빨간 두건 등 동화책의 삽화를 그렸고, 성서 삽화, 실락원 등 엄청난 작품을 남겼다.



귀스타브 도레의 단테 신곡 삽화는 여기(http://www.worldofdante.org/gallery_dore.html)에서 볼 수 있다.

또 그의 성서 삽화는 여기(https://en.wikipedia.org/wiki/Gustave_Dor%C3%A9%27s_illustrations_for_La_Grande_Bible_de_Tours)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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