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이야기

마르셀 뒤샹 두번째

haghiasophia 2019. 4. 7. 16:14

앞글에서 마르셀 뒤샹의 회화의 흐름을 쫓아가보았다.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 미래파의 빠른 흐름을 거쳐, 25세에 이르서서는 신부bride에서는 입체적, 기계적 형태로, 26, 27세에 이르러서는 초콜릿 분쇄기에서 붓질이라는 느낌이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소위 회화라는 것을 놓아버리고, 다른 실험을 한다.


한 작가의 연대기에서 미술사조의 흐름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변화해 갔다.


그의 다음 실험은 그 유명한 레이메이드 제품들이었다.

뒤샹展에는 1913년작 자전거바퀴, 1917년작 '샘', 1914년작 병걸이, 1916~17년작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 1916년작 숨겨진 소리로가 전시되어 있었다.


(위/아래 사진 출처 : https://www.khanacademy.org/humanities/art-1010/wwi-dada/dada1/a/introduction-to-dada)


병걸이는 백화점에서 제품을 사와서 마르셀 뒤샹이 서명을 했다.

전시품은 1961년의 복제로 서명에 복제라고까지 했다.

그러면 평범한 병걸이가 마르셀 뒤샹의 예술품으로 변모를 한다.

그게 레디메이드 예술인 것.

전시관 밖에 많은 사람들이 수도꼭지나 팬 등 물건들을 갖다 놓고 레디메이드인양 흉내를 내었다.

미술관 체험 프로그램의 일환이겠지만, 이런 레이메이드는 작품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

1913년의 자전거바퀴, 1914년의 병걸이도 이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1917년에 마르셀 뒤샹은 남자용 소변기를 사서 '샘'이라고 전시하려고 했다.

주최측에서 투표끝에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게 되고

뒤샹은 잡지를 만들어서 쟁점화시킨다.

아래는 나무위키에 실린 관련 내용이다.


뒤샹은 자신이 발간하는 다다이즘 잡지인 <The Blind Man>에 'R. Mutt' 라는 무명의 작가를 옹호하는 척 하며 이 작품에 대한 글을 투고했다.

"분명히 어느 예술가라도 6달러를 내면 전람회에 참여할 수 있다. 머트 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 씨의 <샘>이 배척당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변기가 부도덕하지 않듯이 머트 씨의 작품 <샘>은 부도덕하지 않다. 배관수리 상점의 진열장에서 우리가 매일 보는 제품일 뿐이다. 머트 씨가 그것을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 실용적인 특성을 버리고 새로운 목적과 시각에 의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창조된 것이다."


작품과 관련하여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 아래와 같은 논쟁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Artist)는 꼭 장인(Artisan)처럼 손수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자기 발상(idea)에 맞는 사물을 선택하기만 해도 되는가? 손재주가 중요한가? 아니면 창의적인 발상이나 계획(idea)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한가?
예술가가 자기 예술작업을 위해 선택한 기성품(ready-made)과 사용하지 않은 다른 일상 기성품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예술작품을 예술로 인증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예술가인가? 관객인가? 미술관같은 예술기관인가?


물론 이에 대한 지향점은, 예술가에 있어 기교나 기술적 요소는 단지 작가의 발상을 전달할 때 필요한 요소일 뿐 (그의 회화에서 그 능력을 보여줬다), 중요한 것은 작가의 생각이나 사상을 전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맞게 계획이나 발상을 세우고, 자기 발상에 맞는 오브제(물건)를 선택하면 된다는 것.


그렇게 마르셀 뒤샹은 1912년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에 이어

1917년 <샘>을 가지고 파격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시대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이후 많은 복제품을 또한 만들어냈다.


그 다음의 파격은

Rrose Selavy라는 시도를 한다. 정체성를 담보로 한 새로운 시도이고 말장난이 많이 들어가있다.


32세때인 1919년에는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려놓고 L.H.O.O.Q라고 제목을 붙인다.

불어 알파벳 발음으로 읽으면 엘 아쉬 오 오 께가 되는데 엘-아(엘라) 쉬오(쇼) 오 께로 들린다. Elle a chaud au cul (그녀는 뜨거운 엉덩이를 가졌다). 말장난을 한다. 아재개그다.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인을 만들어 낸다.

33세, 34세때 여성으로 변신을 시도한다. 초현실주의 사진작가인 만 레이와 작업을 같이 했다.

Rrose Selavy라는 이름도 말장난이다.

하긴 1917년 <샘>을 낼 때의 R.Mutt도 말장난이었으니 그의 아재개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해왔던 거.

R에흐 rose호즈 selavy셀라비는 에r호스 세라비, 즉 'eros, c'est la vie 에로스, 그것은 인생'이 되는거다.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시도를 했었고.


또 63세인 1950년에는 루이즈와 월터 아렌스버그 부부라는 훌륭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생전에 그의 작품을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모으는 일까지 한다.

이런 비슷한 맥락의 작업이 <여행가방속 상자>라는 작품이다.

어떻게 보면 작가의 도록같기도 하고, 미니어쳐 형태의 콜렉션 같기도 한,

그가 여행가방에 짐을 꾸리듯, 그가 창조해내었던 작품을 차곡차곡 꾸려 놓는 방식이다.


가운데 작게 <샘>이 있다.

샘 오른쪽에 큰유리가 있고, 왼쪽에 킹과 퀸을 에워싼 누드들, 그리고 신부가 보인다.

위의 것은 MoMa에서 찍은 사진이고, 아래는 pinterest 사진이다.


조금씩 버전마다 다르긴 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개념을 만들고, 그 핵심 개념들을 소재로 여러 형식을 시도하는 느낌.


이보다 앞선 58세에는 또다른 85세의 마르셀 뒤샹이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5와 8을 거꾸로 놓고 세월을 건너뛰어버리는 엉뚱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유작을 남기고 떠난다.

20년을 준비한 작품이라고 한다.

마르셀 뒤샹, <에땅 돈네 (1. 폭포수 2. 점등용 가스:가 주어졌다고 할 때) Étant donnés (Given: 1 The Waterfall, 2. The Illuminating Gas)>, 1946–1966

나무로 된 문에 두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그 구멍으로 들여다 보면 나신의 마네킹이 손전등을 들고 있는 관능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단의 두 개의 사진은 무대 세트다. 마네킹은 실제 수풀에 누워 있다.

배경은 또 좀 더 떨어져 있다.

Étant donnés는 Being given이다.

주어진 것. 그렇다면 타고 태어난 것인데, 호기심을 우선 던진다.

문틈에 구멍. 그 구멍 속에 무엇이 있는가 들여다보는 궁금증... 타고난 거 맞다.

그런데 그 안에 부서진 벽이 있고, 성적인 오브제, 마네킹이 마른 가지 둥지 위에 있다.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고 한 손엔 램프를 들고 있다.

멀리 있는 언덕에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있다.

예술가라면 50년 100년 뒤의 진정한 대중을 생각하고 작품을 해야 한다고 했던 그가

20년간의 작업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가 혼돈스러웠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예술 작품은 공개적인 엿보기였다고 한다면

Étant donnés라는 이 작품은 관객이 작품을 엿보고나면 누가 자신을 응시하지 않았는지 살피게 만드는 작품이라고 하는 설명이 솔깃하다.

작품이 응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응시당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뭐라고, 내가, 관객이 작품이라고? 완전히 뒤바뀌는 개념이다.


마르셀 뒤샹은 1912년 항공 공학 박람회를 관람한 후 친구에게

'이제 예술은 망했어, 저 프로펠러보다 멋진 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겠어?'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1926년에는 현기증 영화라는 작품을 만들고 나서는,

1935년에 광학 원반 형태로 영화속의 오브제를 제품으로 만들어서 박람회에 출품하기까지 한다.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뒤샹은 예술가로 살아오면서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에

'그림을 그린 것, 삶을 이해하는 요인으로 삶의 방식(modus vivendi)을 창조하기 위해 예술을 한 것,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 형태의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 가장 만족스럽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의 삶은 25세에 회화를 접고, 30세에 <샘>으로 논점을 크게 던지고, 30대 초반에 성적 정체성 실험도 하고 하고 싶은대로 성공적으로 잘 살았다.


멋있게 삶을 살다 간 사람이다.


문득 빈센트 반 고흐가 스친다.

평생 그림 한번 제대로 팔아보지 못하고 힘들게 살다 간 사람.

그렇다면 성공의 행복의 명예의 기준은 무엇일까가 생각에 잠기게 된다.


끝으로 마르셀 뒤샹과 관련한 사진 한장.

그는 체스도 잘했고. 체스와 에로스를 모두 담아내는 1963년에 찍은 사진이 있다. 상대는 당시 20세의 이브 바비츠라고 하는 소설가다.

체스가 벌어지는 테이블의 배경으로 <큰유리>가 보이고 있다.

이 사진이 찍히게 된 이야기는 여기(https://en.chessbase.com/post/the-story-of-a-picture)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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