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이야기

라캉 그리고 큐비즘

haghiasophia 2019. 3. 3. 00:07

오늘의 미학강좌는 라캉에서 시작해서 큐비즘까지 갔었다.

라캉이 직접 쓴 책은 Ecrits라고 하고

세미나 하면서 남긴 기록들도 있는데 7회와 11회에서 라캉이 예술에 대해 언급했다고 한다.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의 직접 제자는 아니나, 자신이야 말로 프로이트의 적자라 했다 한다.

다른 제자들은 이드(무의식)가 있는 곳으로 에고(의식)가 가야 한다고 한 반면 (무의식이 있는 곳으로 의식이 가서 고쳐야 한다)

라캉은 이드(무의식)가 있는 곳으로 에고(의식)이 가서 우선 봐야 했다고 한다. (병을 고치려면 증상을 봐야 한다)

프로이트와 소쉬르는 동시대 사람이었으나 서로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후대인 라캉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소쉬르의 언어학, 그리고 로만 야콥슨, 레비스트로스, 데카르트까지 접목했다고 한다.

로만 야콥슨은 언어학자로 은유와 환유를 통해 압축과 전치를 이야기했다 하고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 (슬픈 열대라는 책이 유명)

데카르트는 성찰, 주체라는 개념을 이용했다 한다.


이런 배경에서 '나'라는 자아는 사회속에서 사회라는 체계 속에서 생성된다.

무의식은 大타자의 담론이다.

우리의 욕망은 사회가 만든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경험에서 나오는데

같은 무의식을 이야기한 라캉의 무의식은 기표/언어에서 나오고

이런 무의식은 도덕관념이 없게 되는데

현실에서 이런 무의식이 통용 가능하도록 보여주는 것이 압축과 전치고

압축과 전치는 언어적으로는 은유와 환유로 바뀐다고 한다.

로만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

은유 : 저들은 우리가 가지고 온 것이 페스트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정신분석은 페스트여야 한다는 의미가 생기고, 페스트로 대치함으로써 확산성/전염성이 생김)

환유 : 검은 베레모의 행진

         (군인을 베레모로 대치)

은유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대치함으로써 새로운 의미가 발생하고

환유는 한 요소를 언급하면서 새로운 의미가 발생 안하고 무언가를 암시하는 기능.


이 개념은 근대와 현대를 나누는 개념으로 넘어가는데

근대는 재현을 하는 은유의 개념이 된다.

재현을 하고 나면 진짜와 가짜라는 게 생기는데

우리의 실제를 가짜로 만들게 된다.

현대는 재현을 거부하고 암시만 한다. 스스로 창조하게 한다.

그래서 재현을 끊기 위해 환유로 가고

피카소와 브라크는 재현을 끊기 위해 추상으로 갔다고.


1909년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이다.

1910년과 1911년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작품이다.

피카소의 1911년 1912년 작품

피카소의 그림을 접한 브라크는 마치 불을 뿜기 위해 석유를 한 모금 마신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한다.

이후 브라크는 마티스 류의 야수파 그림에서 피카소의 유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큐비즘, 입체파는 공간에 주목하는데

입체주의는 크기/부피/무게(공간)의 느낌을 다시 회복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했다고 한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공간을 재구성했고 (1909년의 그림 참조)

이는 아래에 있는 세잔의 1904년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11년으로 접어들면서 피카소와 브라크는 공간 구획을 극단화하기 시작했고 (완전히 부서짐)

이는 분석적 입체주의로 형상화 되었다고 한다.

공간 위주의 입체주의는 시간성이 없는 반면

이런 스타일이 이태리로 넘어가서는 시간성(움직임)을 반영하여 미래주의로 발전했다고 한다. (상단 우측 뒤샹의 그림)


멜라니 클라인이라는 심리학자는 라캉과 다른 관점을 이야기했다고 한다.

카린 미카일리스의 우울증 환자 기록을 이야기하는데

우을증 치료를 받던 어느 여인이 증상이 호전되었고 결혼까지 했었는데

우을증이 재발했다는 이야기다.

원인을 찾아들어가니, 시동생이 화가였고, 작품을 그 여인의 집 벽에 빼곡이 보관해 왔는데

어느날 그림 한점이 팔렸고, 그 공백이 그 여인의 우울증을 불러왔다는 이야기였다.

그 여인은 시동생이 사용하는 같은 팔레트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작품을 완성하여 팔려간 그림이 있던 자리에 걸었고 시동생이 그림을 극찬했고

우울증이 나았다는 이야기인데

멜라니 클라인의 해석은 그림이 여인의 우울증을 해소했다는 것인 반면

라캉의 해석은 그 여인이 칭찬을 받아서 우울증이 해소되었다는 것이다.


승화와 관련하여

프로이트는 승화는 금지된 충동을 사회적으로 용인된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이라 했고

멜라니 클라인은 승화는 공백의 출현을 봉합하는 것

라캉은 증상을 탐닉하여 대타자를 불러오는 것이라 했다 한다.


공백은 무언가를 가능케 하는 균열이고

예술에서는 히스테리적 구조가 왜상으로 발현되고

종교는 강박증적 구조

과학은 정신병적 구조를 갖고 있다고 라캉이 보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