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622~632), 1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 (632~634), 2대 칼리파 우마르 (634~644), 3대 칼리파 우스만 (644~656) 이후 마지막 정통 칼리파가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656~661)이다.
그는 최초의 남자 무슬림이었고, 무함마드의 사촌동생(30살 차이)이었으며,
무함마드이 암살자가 몰려왔을 때, 그를 대신해서 침대에 누워 있기도 했고,
메카 세력이 군사적 압박을 가할 때 가장 맹렬히 저항했고,
이슬람 세력이 참패했던 위기 때도 무함마드를 보호한 극소수중 하나였으며,
무함마드의 첫째딸 파티마와 결혼하여, 무함마드의 유일한 남자 후손인 하산과 후세인을 낳았다.
그래서, 이슬람 내에서는 알리를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계속 보아 온 관계로 1~3대 칼리파를 정하는 시점에, 늘 우선 순위에 알리가 있어 왔다.
하지만 1대 때에는 나이가 많은 아부 바크르에게 차례가 갔었고
2대 때에도 아부 바크르가 우마르를 지명했고, 갈등이 있었으나 알리가 지지를 선언하며 원만히 넘어 갔었다.
그리고 3대 때에는 이미 이슬람 세력이 상당히 커진 이후였고, 세속화도 많이 진행된 시점이었다.
마찬가지로 후임 칼리파에 대한 갈등이 있었고, 세속화가 진행된 만큼 이슬람 상류증이 우스만을 지지했었다.
우스만은 재정을 개혁하고, 세금을 걷었으며, 친족에게 막대한 보수와 권력을 제공했다.
세금 부담에 따라 이집트 시민들이 대표까지 보내며 항의하자 우스만이 알리의 중재를 요청했고, 알리가 거절하고
우스만은 살해당한다.
또, 우스만을 살해한 폭도들에 의해, 이후 결과적으로 알리가 추대된다.
알리는, 우스만 시대에 각종 우대를 받던 쿠라이시 부족들이 반발하면서 고초를 겪는다.
쿠라이시 부족들은 알리 반대 운동을 지속하고,
알리는 국면 회복을 위해, 수도를 메디나에서 메소포타미아 중류의 쿠파로 천도한다.
이슬람의 상류층은 초기 이슬람의 순수성에 거부반응을 보이며, 알리를 자신들의 재산을 위협하는 위험분자로 여겼다.
알리는 우스만이 임명한 부패한 총독들을 해임했으나, 총독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내전을 시작한다.
또한 예멘 총독은 무함마드의 아내 아이샤에게 접근하여 충돌을 야기하는데, 알리와 아이샤는 합의를 이루게 된다.
그럼에도 쿠라이시 부족 등은 반발하여 결국 낙타전투가 벌어져 알리가 승리를 거둔다.
이후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이븐 아비 수피안이 반란을 일으킨다.
전황이 알리에게 유리해지자, 무아위야는 협상을 요구하고, 탁월한 협상력을 발휘해서 시리아와 이집트를 차지한다.
이에, 알리의 지지자들이 실망하게 되었고, 결국 알리는 661년 암살 당한다.
이후 무아위야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고 칼리파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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