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동로마, 터키 주변

아리우스

haghiasophia 2018. 3. 17. 22:41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두정치를 끝낸 324년부터,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기 위해 수도를 건설하는 동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니코메디아에 머무른다.

이 무렵, 아리우스 논쟁이 벌어진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 대탄압은

밀라노 칙령에 의해 끝이 난다.

아리우스 논쟁은 니케아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리가 되고,

이후 테오도시우스 칙령을 통해 로마에서는 기독교가 국교가 된다.

종교의 자유는 믿을 신앙을 선택하는 것에의 자유인 반면

특정 종교가 국교가 된다는 것은 믿어야 한다는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요즘 시각에서는 국가가 정한 종교를 국민 모두가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말이 안되는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겠다.


아리우스는 누구였고, 어떤 시각을 가졌길래 문제가 된 것이었을까?

아리우스는 리비아 출신 부모에게서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320년경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제국의 문화적 중심지였었다.

아리우스는 이 도시에서 뛰어난 사제중 하나였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증언하면서, 처음부터 철학이나 신학을 제시하지 않았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유일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일 수 있는가?’ ‘모든 변화를 초월하는 분이 하느님이시다라고 굳이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대체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은 분이 어떻게 하느님일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이 생겨나고 형태를 갖춰갔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받기 전까지만 해도, 지역적으로 한정된 불일치의 문제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하느님은 동시에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이들은 성부는 성자와 마찬가지로 수난을 받으셨다고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성부와 성자를 구분하고, 성부와 그분의 말씀(로고스)을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성자는 하느님이지만, 성부와 똑같은 하느님이 아니다. 성자(로고스)는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 예수는 인간이었는데, 성부에 의해 양자로 입양되어 하느님이 되셨다.” 몇몇 성경 구절들이 이런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저술가들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단어들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상당한 혼란을 초래시켰다 


이런 역사적 배경하에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본당 신부로서 많은 존경을 받던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아리우스는 앞선 시대의 많은 사람들처럼, 자신도 유일신 하느님(시작이 없으신 유일한 하느님)의 관념을 고수하려고 했다.

그리스 철학을 취한 그는 그러면서, 예수님을 진정한 하느님도 인간도 아니라는, 으뜸 피조물이라는 이론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알렉산드로는 예수님의 신성이 부인되거나, 피조물을 흠숭하는 문제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아리우스를 파문한다. (318년)


아리우스는 이에 반발하여,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니코메디아로 갔다.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하던 니코메디아의 대주교, 그리고 시리아의 고위 성직자들이 아리우스의 견해를 지지한다.


이런 논란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주교를 중심으로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제국을 통일하고 그리스도교를 합법종교로 인정한 지 얼마되지 않아 분열의 위기에 처하자

최초의 공의회를 열 것을 명하여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열리게 된다.

그리고 아리아스파는 이단으로 결론이 난다.


그런데도, 아리우스파는 당시 로마제국의 동방 지역에서 널리 지지자를 얻는다.

콘스탄티우스2세337~361는 아리우스주의를 서방 교회에 강요하기도 한다.

아리우스파는 로마 영토 바깥에 있는 게르만족에 선교를 하여 게르만족에도 널리 퍼지게 된다.


374년 암브로시오가 밀라노의 집정관으로 부임했을 때는

밀라노 주교의 임명을 두고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가 다툴 때였다.

이때 암브로시오는 주교로 선출되면서, 아리우스파를 배척하기 시작한다.

그는 동방 수사학을 이용하여 아리우스와의 논쟁에서 승리한다.

그의 설득 능력은 당시 그라티아누스 황제375~383까지도 아리우스파에서 아타나시우스파로 전향하게 만든다.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사망한 이후 발렌티아누스2세375~392 의 섭정이었던 유스티나는 암브로시와와 대립하며

아리우스파를 지지한다.

로마에서의 대립은 유스티나가 사망하고, 발렌티아누스2세까지 아타나시우스파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아리우스파는 로마에서 존재를 감추게 된다.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

게르만의 동고트 왕국, 서고트 왕국, 반달 왕국, 롬바르드 왕국, 부르군트 왕국, 프랑크 왕국 등에서 아리우스파는 강한 세력을 갖고 구 서로마제국 지역에서 지배종교가 되어, 오히려 가톨릭을 박해한다.

특히 반달족이 진출한 북아프리카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보복 학살을 많이 당했었다.


지배자이자 무학무식이며 소수인 게르만은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했고,

다수이며 피지배자이며, 문화적으로 당시 우월했던 로마인들은 가톨릭을 믿고 있었는데,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동방 정교회와 대립되는 구도에서

게르만인들은, 가톨릭의 보호자로 나섬으로써 로마 교황의 종교적 권위를 등에 업고

동로마제국의 황제와 대등한 관게를 구축하려는 그림하에서

486년 프랑크 제국의 클로비스의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시작으로

남은 게르만 왕국들도 이런 저런 이유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아리우스파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