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동로마, 터키 주변

Empress Zoe 여제 조에 모자이크

haghiasophia 2017. 11. 29. 03:31

옛날 콘스탄티노플에 한 공주가 살았었다. 그 공주의 이름이 바로 Zoe.

큰아버지인 바실리우스 2세는 당시 동로마제국 주변에 있었던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와 파티마 왕조, 불가리아를 차례차례 정리하고 동로마제국의 새로운 중흥기를 이끌던 황제였는데,

바실리우스 2세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오토 3세에게 조카딸을 시집보내려 했었다.

그 때가 1002년. 조에를 태운 배가 이탈리아로 출발했었으나, 도착 전에 오토 3세가 2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조에는 다시 동로마로 돌아오고 말았었다.

조에도 그때 나이가 23살이었고, 그 때 두 사람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동/서로마의 왕위를 계승했었더라면, 세계 역사는 크게 달라졌었을 것이다.


혼사를 아쉽게 놓쳐서인지 조에의 결혼은 늦은 시기에 찾아온다.

바실리우스 2세의 뒤를 이어 동로마의 황제가 된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8세는 1028년 임종을 앞두고 둘째 딸 조에의 혼사를 챙긴다.

혼사를 놓치고 26년간 황궁의 규방에서 살며, 이미 적령기를 훌쩍 넘은 50세의 미혼 공주.

공주와 결혼하면,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상황에서 고등법원 최고 판사이자 소피아 대성당의 관리자, 수도의 행정장관을 맡고 있는 원로원 의원인 로마노스가 물망에 오르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8세는 로마노스를 불러, 당장 지금의 부인과 이혼하고 공주와 결혼하여 황제가 되거나, 두 눈을 뽑히고 감금되거나 하는 선택을 강요 받는다.

그의 아내는 눈물을 머금고 머리를 자르고서 수도원으로 들어가 버렸고, 로마노스는 로마노스 3세로 황제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50대의 조에와 60대의 로마노스 3세의 모자이크가 소피아 성당 2층 벽면에 장식이 되게 된다.


로마노스 3세는 6년의 재위 동안 별다른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실망한 조에는 로마노스 3세를 암살하고, 젊은 미남인 미카엘 4세와 1034년에 재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소피아 성당의 모자이크는 황제의 이름과 얼굴이 수정된다.

24세에 즉위해서 7년간 통치하던 미카엘 4세가 죽은 후, 그의 입양한 조카인 미카엘 5세가 1041년 즉위하게 된다.

4개월의 재위 기간동안 양어머니인 조에를 수도원에 내쫓자,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반발하여 폭동을 일이킨다.

그리하여 미카엘 5세를 내쫓고 적법한 통치권이 있는 조에를 여제로 복귀시킨다.(1042년)

그후 여제 조에는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인 콘스탄티노스 모노마쿠스와 1042년 세번째 결혼식을 올리고, 콘스탄티노스는 콘스탄티누스 9세로 즉위한다.

그리고, 다시 모자이크 속의 남편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9세로 수정이 되고, 이때 64세였던 조에의 얼굴이 앳된 모습으로 수정이 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다.

황후 조에는 72세의 나이로 1050년 죽게 된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대제 사후에 동/서로마가 분리되었고, 476년 서로마가 멸망한 후, 동로마가 천년을 더 지속하게 된다.

4세기에서 6세기까지 진행되었던 게르만족의 대이동의 시대를 지나, 동로마는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때 다시 한번 크게 역사의 한 획을 그었었다.

이후 이슬람의 성립과 확장 시기를 거쳐, 동로마의 바실리우스 2세 시절 다시 최강대국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바실리우스 2세 이후 콘스탄티누스 8세, 미카엘 4세, 미카엘 5세, 조에, 콘스탄티누스 9세를 거치는 기간은 동로마 제국이 다시금 약화되었던 시기가 된다.


콘스탄티누스 9세에게는 1043년 키에프 전쟁, 1046년 파티마 제국과의 동맹, 1047~1059년 페체네그 전쟁, 1047~1048 튀르크와의 전쟁, 그리고 이탈리아 전선의 과제가 있었다.

그리고 1054년 그가 초청한 교황 레오 9세의 사절단이 당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파문하고,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는 로마교황을 파문하는 동서교회 대분열 사건이 벌어진다.

(1965년 카톨릭과 동방정교회는 서로에 대한 파문을 철회하고 서로를 적법한 보편교회로 인정하는 공동 선언문을 발표한다)


처음 모자이크를 보면서, 누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이어서 그 배경이 궁금해졌었다.

한 여인이 새겨진 모자이크는 동서로마제국이 재합병될 수도 있었던 이야기와 동서교회 상호 파문 이야기가 묻어 나왔다.

특이하지 않아 잘 지나치는 동로마 역사의 한 시기가 이 모자이크를 통해 빛을 발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역사는 기록을 남기는 자의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또한, 이 모자이크는 회벽을 걷어내고 다시 빛을 본 것들 중 하나이기에 더 그러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모자이크의 내용은 콘스탄티누스 9세는 봉헌금을, 조에는 봉헌금을 낸 사람의 명단을 예수님께 봉헌하는 것인데, 황제들의 관행으로 위신을 세우기 위해 하는 것일까, 아니면 개인적인 회개와 바램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한 표 던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