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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신학강좌] 314 세계교회사 (74) 근세교회-가톨릭 쇄신운동/김희중 신부
복음정신으로 기치… 저변 “확대”
루터 이전에 교회 내부서 싹 터
발행일 | 1994-10-02 [제1923호, 6면]
이미 앞서 살표본 대로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의 결과는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특히 그리스도교계에 대단한 변혁을 초래하였다. 이후 가톨릭교회에도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쇄신을 위한 변화가 더욱 촉진되었는데 이를 두고 가톨릭개혁운동이라고 평가하는 역사가들도 있고 가톨릭의 반 종교개혁운동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운동 이후 가톨릭의 변화가 그 자체의 요구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이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비롯되었는지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하고 있다.
어떤 역사가는 교회쇄신운동의 필요성이 여러 계층에서 요구되어 1400년대 말이나 1500년대 초에 이미 여러 나라 교회에서 쇄신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다만 그 결과가 미진하게 드러나고 있었을 뿐이었다며 쇄신운동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 쇄신운동의 성격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루터의 종교개혁운동 이후에 더욱 가시화된 가톨릭교회의 여러 운동들을「가톨릭 쇄신운동」으로 부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 이후 가톨릭의 변화가 보다 적극적으로 촉진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부터 가톨릭교회 안에 여러 가지 정화운동이 이미 시작되었고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지만 그 정신과 방법은 달랐다. 즉 기존의 정신과 제도 자체를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송두리채 뜯어고치는「변혁」을 목표로 삼거나 루터의 종교개혁을 반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초기 교회의 복음정신과 수도회 창설자의 정신에 더욱 충실하며 시대의 필요에 적응하는 가톨릭 내의 쇄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을 전후로 한 가톨릭교회에서 시도된 쇄신운동은 평신도, 수도자, 교회의 교계 당국 등 교회의 모든 계층에서 다양하게 추진되었는데 대충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와 병자들을 돕는 애덕을 실천하려는 평신도들의 활동이 돋보였다. 이들은 애덕활동과 성체신심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이 뜻에 동참하는 평신도들끼리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시대의 필요에 부응하는 결과였으니, 예를 들면 1495년에 발생하여 대단히 많은 인명을 앗아간 페스트 전염병이 창궐하였을 때 죽음을 무릅쓰고 병자들 간호하는 애덕을 실천하였다.
이들은 매달 고해성사를 보며 성체신심을 돈독히 하고 공적으로 하는 애덕활동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비밀리 실천하는 애덕행위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활동을 보다 조직적이고 영속적으로 하기 위하여 이 평신도 회원들 중 어떤 이들은 준수도회를 창설하여 정식 수도회로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15, 16세기에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에게 봉사하는 애덕활동의 수도회들과 가톨릭 정신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키기 위한 교육수도회들이 다른 어느 시대보다 많이 창설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운동 이전부터 이미 시작한 오래된 수도회들의 쇄신운동의 결과가 대외적으로 뚜렷이 드러나지 못했지만 16세기에 와서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 수도회들은 기존의 회칙을 폐기하고 새로운 회칙을 만들거나 제도를 바꾸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초기 교회 이후부터 줄곧 교회쇄신운동의 근본 정신이자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던「초기 교회의 복음정신으로」「창설자의 정신으로」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이들은 기존의 회칙에 충실하기 위하여 청빈, 침묵, 봉쇄, 참회, 노동의 생활을 엄격하게 준수하였다.
교회 영성생활의 꽃이자 동시에 최후의 보루는 역시 수도생활이다. 교회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얻은 교훈은 사도회 영성생활의 상태가 바로 그 시대의 교회 영성생활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성공적으로 결실을 맺은 모든 수도회들의 쇄신운동의 기본적인 정신은「침묵과 청빈의 생활」을 엄격히 준수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교황이 지정한 봉쇄생활을 엄수하기 위하여 사제나 수도자의 긴박한 병 치료 이 외에는 일체 수도원 담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까지 하였다.
그동안 세속생활에 파묻혔던 기존의 수도회들이 폐쇄적이라고까지 오해할 만큼 세속과 결별하는 쇄신생활을 추진하고 있을 때, 시대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사도적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수도회들이 창설되었는데 이들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돕고 가톨릭 신앙을 사회 깊숙히 침투시키기 위한 교육활동을 수도생활의 중요한 요소로 선택하였다. 그러나 이 사도직 수도자들에게도 침묵과 청빈생활은 수도생활의 본질적인 요소였다.
교계 당국자들에 의해서도 교회 쇄신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들이 시도되었었다. 즉 교구장들은 사제생활의 쇄신을 추구하기 위한 교구회의를 열어 사제들이 자기 입지에 상주하는 의무를 준수토록 하며 기존의 여러 가지 특권의 한계와 규칙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한하며 사목 방문을 자주 하였다.
교황청에서도 교회 쇄신을 위한 공의회를 열려고 여러번 계획하였으나, 당시 교황권을 위협하고 있던 공의회 수위설과 유럽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교황들은 망설이다가 자주 연기하였다. 사실 당시 교회쇄신운동을 가장 더디게 추진하였던 계층은 교황청이었다고 평가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김희중 신부ㆍ광주가톨릭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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