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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은행, 메디치 은행

미술 이야기

by haghiasophia 2022. 2. 12.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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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은행의 출현

11세기 이탈리아의 환전상들은 각 도시마다 다른 금화와 은화의 가치를 분별할 수 있어야 했다. (많은 경험과 정보가 필요)

이런 환전상들에 의해 만들어진 중세 은행들은 금을 보관하는 역할도 했는데, 금을 예치한 사람들에게 보관 수수료를 받고, 예치한 금의 무게를 적은 증서를 발행해줬다.

또한 이렇게 예치받은 금을 가지고 상인들에게 대출해주며 이자를 받았는데, 이때도 증서를 발행했었다.

은행은 보관한 금보다 더 많은 증서를 발행했고, 그에 따라 이윤을 더욱 더 취했으며, 상인, 귀족, 왕족들도 은행을 이용했고, 이런 금융자본들이 은행을 만들어 갔다고 한다.

현존하는 은행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다는 이탈리아의 '몬테데이파스키 디시에나 은행'이 이 시기인 1472년 설립되었다.

 

피렌체의 방직 산업과 금융 산업

메디치가를 일군 조반니 디 디치도 금융업 이외에도 방직공장으로 부를 일궜다고 나온다.

피렌체는 12세기말부터 영국과 네덜란드로부터 양모를 수입한 후, 염색/가공한 옷을 유럽으로 되파는 무역업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14세기 중반 피렌체의 모직생산 규모는 줄어드는데, 수익률이 떨어지자 피렌체의 모직 산업은 고급화에 치중했었다고 한다. 반면 백년전쟁 기간동안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 지역의 양모 산업을 파괴하고, 양모 제조업자를 잉글랜드로 강제 이주시켰다고 한다.

양모 거래와 동반해서 피렌체의 은행업도 유럽 전역으로 팽창하게 되었는데, 이때 피렌체의 바르디와 페루치 가문이 은행업으로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백년전쟁 기간중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침공할 때 빌린 1,365,000플로린의 대출금에 대해 1339년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면서, 피렌체의 두 은행가문은 파산하게 된다. 이 금액은 1338년 피렌체 전체의 직포생산 총액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피렌체의 방직 산업도 크게 위축되었고, 이어 터진 흑사병으로 위기가 가중되게 된다.

 

메디치 은행 (1397-1494)

조반니 디 디치는 1370년부터 '비에리 디 캄비오 Vieri di Cambio'에서 일하다가 1397년 이 은행의 부채와 자산을 물려 받은 후 피렌체에 메디치 은행을 설립했다. 메디치 은행의 피렌체 본점과 각 지점의 회계 장부는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양피지에 복식부기 형태로 부채와 채권을 기록했고,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가 아닌 로마숫자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

메디치 은행은 초기 총직원 17명에 피렌체 본점, 로마, 베네치아, 나폴리, 가에타 지점으로 시작, 직원 65명과 지사 7개를 갖춘 당대의 주요 은행으로 성장했고, 본지점간 이동 시간이 오래 걸려 지점은 상당한 자치권을 갖고 운영되었다고 한다. 피렌체에서 베네치아까지는 10일, 아비뇽까지는 30일, 바르셀로나 60일, 런던 90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코지모는 광산,제조,보험업으로도 눈을 돌려 큰 수익을 거두었으나, 메디치 은행은 코지모가 1464년 사망하면서 성장을 멈췄고, 영국 장미전쟁(1455-85)때 런던 지점이 투자실패로 파산했고, 1494년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되면서 문을 닫았다고 한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통치에 집중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금융업은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스페인과 함께 중세 금융업의 중심이었다고 하며, 이후 15세기말 독일 남부로 금융중심이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교황의 징세원

한편 최초의 광범위한 금융거래를 하는 곳으로 교황청이 있다.

이탈리아 주요 영주들은 물론 영국과 북유럽까지 교황의 징수원들이 다녔는데 이때 피렌체와 시에나의 은행가들이 관리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

메디치 가문은 발다사레 코사 추기경을 후원했는데 코사 추기경이 피사 공의회의 알렉산드르 5세 교황(하지만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이 퇴임을 거부하여 또 하나의 대립교황이 됨)을 이어 교황이 되고, 이 교황청의 은행 역할을 했었다가, 요한 23세를 끝까지 후원하여 신용을 얻기도 했다. 이후 1424년 마르티노 5세 교황의 은행 역할을 했다고 한다.

 

교회의 분열 (로마 교황과 대립교황들)

클레멘스 5세때인 1309년부터 시작된 아비뇽 유수는 1377년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가면서 끝났다. 하지만 그의 사후 우르바노 6세가 즉위하면서 대립교황이 존재하는 교회의 분열 시대가 시작된다.

로마의 우르바노 6세 1378-89, 보나파시오 9세 1389-1404, 인노첸시오 7세 1404-06, 그레고리오 12세 1406-15 시기에 아비뇽에는 클레멘스 7세 1378-94, 베네딕토 13세 1394-1423

피사에는 알렉산드르 5세 1409-10, 요한 23세 1410-15라는 대립교황이 존재했었다.

이후 콘스탄츠 공의회를 거쳐 로마/아비뇽/피사의 교황이 모두 폐위되고 1417년 마르티노 5세 교황이 추대되었다.

 

아래 표에서 메디치 은행은 조반니/코시모/피에로/로렌초/피에로2세 시기에 존재했었다.

 

 

 

참조한 글

1. 중세 은행의 출현

https://kimppo78.tistory.com/entry/%EC%A4%91%EC%84%B8-%EC%9D%80%ED%96%89%EC%9D%98-%EC%B6%9C%ED%98%84?category=846212?category=846212

2. 피렌체의 방직 산업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isHttpsRedirect=true&blogId=maximilian1&logNo=110189008847&categoryNo=22&proxyReferer= 

3. 메디치 은행

https://brunch.co.kr/@rlfrjsdn/21

4. 교황의 징세원

https://m.blog.naver.com/diamis/221264399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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